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8월 종파사건 (문단 편집) ==== 김무정과 박헌영의 숙청 ==== 그러나 전쟁은 북한 지도부의 기대와는 완전 다르게 진행되었다. 개전 초기에는 그야말로 승승장구하면서 [[적화통일]]이 눈앞에 보이는 듯 했지만, 예상과 달리 미군이 참전한 것이다. 그것도 대단히 빠른 시간에 엄청나게 많은 병력을 전선에 투입하면서 전세가 완전히 뒤집힌다. 미 24사단의 스미스 부대가 겪은 오산 전투 이후 인천상륙작전까지 미군은 주일 미군과 미국 본토로부터 가용한 부대를 최대한 빠르게 한국 전선에 투입시키려고 난리를 쳤다. 특히 낙동강 방어전에서 정말 레이스였다. 이 때문에 북한은 초창기의 예상과 달리 멸망 직전까지 몰렸다가 중공군의 참전과 소련의 지원으로 간신히 패전 위기에서 벗어난다. 이제 궁지에 몰린 김일성 정권은 실패에 대한 책임추궁으로 권력 기반이 약화될 것을 우려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전쟁 실패의 잘못을 뒤집어 씌우기 위한 희생양을 찾기 시작했고 여기서 그 대상으로 떠오른게 박헌영과 남로당파였다. 김일성 정권은 한참 전쟁이 진행 중이던 1953년에 이미 [[박헌영]]을 체포하고 권력의 핵심부에서 남로당파 간부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http://news.joins.com/article/4012467|전 북한 내무상, 내가 치른 북한의 숙청]] 남로당이 먼저 숙청된 건 [[중국인민지원군]] 수십만이 북한에 주둔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과 연계된 연안파를 정면공격하는 건 힘들었기 때문이다. 소련군정이 직접 심어두고 간 소련파 간부들에 대해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반면에 남로당계는 인원은 상당하고 간부들의 명성은 높았지만, 국내 기반은 부실하고 외부 후원자는 전무했기에 가진 것은 많은데 지킬 힘은 없는 처지였다. 박헌영과 남로당계 수천여명은 대부분 일제강점기 때부터 남쪽에서 활동하던 사람들로 미군정과의 관계가 파탄나고 총파업과 무장봉기가 실패하자, '''할 수 없이''' 자신들의 모든 기반을 버리고 '''맨몸으로''' 월북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다들 경력은 화려하지만, 정작 북한에는 기반이 전혀 없었고 자신들의 명성만큼의 지위를 얻지도 못하였다. 당연히 이들은 오매불망 남한으로 돌아가기만을 원하였다. 그러던 참에 김일성이 남한을 침공할 계획을 들고 나오자 이를 반대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느낀 김일성과 대립하던 파벌이 남침에 대한 의견을 내놓음으로써 입지를 다지고자 했다. 박헌영은 1946년에는 스탈린에게 김일성의 무력 통일론을 반대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지만[[http://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2709801|#]], 시간이 지나자 "조선인민군이 진격을 개시하면 남조선에 남아 있는 과거 당원들과 좌익계 대중들이 들불처럼 봉기해서 인민군을 도울 것"이라고 호언장담하였다. 이들은 일단 통일만 된다면 자신들의 본거지인 남한의 지역적 기반을 활용해서 전후에 자신들이 정권을 주도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특히 남로당계는 남쪽과의 접촉이 완전히 봉쇄된 상황에서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내려온 좌익계 대중조직, 구 남로당 조직이 아직도 지하에 유지되고 있다고 제멋대로 판단했다. 그리고 이들이 전쟁에 결정적 기여를 한다면 자신들의 발언권이 크게 강화될 것이라고 낙관하였다. 하지만 박헌영의 호언장담과 달리 남쪽에선 인민군을 돕는 어떠한 움직임도 없었다. 이미 [[대구 10.1 사건]], [[여수·순천 10.19 사건]], [[제주 4.3 사건]] 등을 거치면서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탄압으로 좌익계 대중조직, 구 남로당 조직은 모조리 괴멸되었고, 대부분의 간부들은 월북 또는 [[전향]]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이승만 정권이 좌익계 활동 경력이 있으면 이미 전향한 사람들까지 모조리 잡아가서 대량학살해버렸기에 남쪽에는 그야말로 사회주의 및 좌파 진영의 씨가 말라버렸다. 이것이 이른바 [[보도연맹 학살사건]]인데 좌익계 간부 출신은 물론 단지 좌익쪽 집회에 몇번 나갔을 뿐인 단순한 참여자에 아무 관련이 없는 민간인들까지 [[마녀사냥]] 식으로 학살당하는 바람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그래서 무장봉기는 커녕, 파업 비슷한 것도 없었다. 김일성은 전세가 뒤집힌 다음에 "남조선 노동자들이 파업으로 물자 수송을 3일만 막아줬어도 우리 노동당이 전쟁에서 이겼다" 면서 박헌영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실제 전쟁 초기 낙동강 방어선까지 몰렸을 때 국군은 궤멸 상태였고, 미군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으니 만약에 부산, 대구 등지에서 민중봉기 혹은 노동자 파업으로 군수품 수송이 어느 정도 지체가 됐다면 정말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어쨌든 박헌영의 호언장담이 김일성 정권이 남침을 결정하는데 영향을 준 것이 사실이었다. 박헌영과 남로당계도 전쟁 실패의 책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고, 남한 침공 실패의 책임을 뒤집어 씌우기도 쉬웠다. 실제로 김일성은 그야말로 빡돌아서 박헌영에게 '''"야, 이 새끼야! 그게 무슨 말인가? 전쟁이 잘못되면 나뿐만 아니라 너한테도 책임이 있어! 너 무슨 정세판단을 그렇게 했는가? 나는 남조선 정세는 모른다."''' 라고 화를 내면서 대리석으로 만든 잉크병까지 집어던졌다고 한다. 더욱이 남로당계의 지도자였던 [[박헌영]]의 경우 해당 시기 김일성을 아득히 능가하는 개인 숭배의 대상이었다. 오늘날 개인 숭배라고 하면 김일성을 생각하지만, 이 당시에는 박헌영에 대한 개인 숭배가 훨씬 심했다. 아래 김태준 글은 일제 말기인 1944년부터 광복까지의 상황으로 국내파 공산주의자의 투쟁이 계속되었음을 보여준다. >경성콤그룹 멤버가 다시 활발한 활동을 시작하였다. 최고지도자인 박헌영 동무는 어대 있는지 모르나 이관술 동무는 울산서 도망해서 대전으로 오고, 이현상·이주상 두 동무는 경남으로 갔다가 적에게 발견되어 다시 대전으로 오고, 인천 최, 하동의 윤과 조, 조의 친구인 이채래, 채래의 친구인 신설정 황 그룹이 직접간접으로 연계되었다. >---- >[[김태준(1905)|김태준]], 연안행 아래는 광복 직후 여론조사이다. ||<-3> '''조선을 이끌어갈 양심적인 지도자'''[br]- 선구(先驅) 여론조사 제1호 - || || 순위 || 이름 || 득표율 || || 1위 || [[여운형]] || 33% || || 2위 || [[이승만]] || 21% || || 3위 || [[김구]] || 18% || || 4위 || [[박헌영]] || 16% || || 5위 || [[이관술]] || 12% || || 6위 || [[김일성]] || 9% || || 7위 || [[최현배]] || 7% || || 8위 || [[김규식]] || 6% || || 9위 || [[서재필]] || 5% || || 10위 || [[홍남표(1889)|홍남표]] || 5% || ||<-3> {{{-2 백분율의 합이 100%를 넘는 것은 복수 응답이 있었기 때문임[[https://blog.naver.com/PostView.naver?blogId=jeongpansa&logNo=222216816107&navType=by|출처]]}}} || 1945년 9월 11일 서울에서 발표된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명단은 다음과 같다. 앞에 있는 숫자가 서열이다. 김일성은 일제강점기에도 조선공산당 활동을 한 적 없고 광복 후 저 명단 발표 때도 외국에 있었고 앞으로도 조선공산당 중앙이 있는 서울에서 활동할 일 없고 평양에서도 아직 권력을 장악하기 전인데 박헌영 계열이 소련이 김일성을 밀어준다는 등의 정보를 갖고 있어서 서열 2위에 넣은 것. ||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 || * 중앙위원: 1.[[박헌영]], 2.[[김일성]], 3.[[이주하(1905)|이주하]], 4.박창빈, 5.[[리승엽]], 6.강진, 7.[[최용건]], 8.[[홍남표(1889)|홍남표]], 9.[[김삼룡]], 10.[[이현상]], 11.이주상, 12.[[이순금]], 13.[[김무정|무정]], 14.서중석, 15.이인동, 16.조복례, 17.[[권오직(1906)|권오직]], 18.박광희, 19.김점권, 20.허성택, 21.[[김용범(1902)|김용범]], 22.홍덕유, 23.주자복, 24.문갑송, 25.강문석, 26.[[최창익]], 27.김근, 28.[[오기섭]] * 중앙검열위원: 1.[[이관술]], 2.서완석, 3.김형선, 4.[[최원택]] || 남북통합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박헌영이 김일성보다 높은 지위인 건 한눈에 보이고, 중앙검열위원 서열 1위 [[이관술]]의 지위도 중앙위원 서열 2위 김일성보다 높았다. >조공 중앙위의 구성은 시기별로 일부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김일성은 박헌영, 이관술에 이어 서열 3위로 올랐다.[* 역사와 현실은 한국역사연구회와 역사비평사에서 발행하는 학술지이고 이 내용은 구글 도서 검색에서 이관술 서열을 검색하면 나온다.] >---- >역사와 현실 issue 48, 253쪽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의 최후 집결체인 [[경성콤그룹]]이 끝까지 일제에 굴복하지 않고 강고하게 투쟁했기에 광복 직후 경성콤그룹의 지도자였던 [[박헌영]], [[이관술]]은 중도우익성향 '선구'의 여론조사에서도 나란히 4위, 5위를 할 만큼 대중과 지식인 계층에게 모두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이 여론조사에서 김일성은 6위였는데 김일성보다 박헌영과 이관술이 지지받은 이유는, 당대 사람들은 일제의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될 수밖에 없는 위험한 국내에서의 투쟁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었다.[* 이관술의 경우 당대에는 위세가 대단해서 울산 사람들이 이관술을 기리는 명문을 대곡천 백보반석에 새겼다고 한다.] 해방 직후 서울 시내에 "박헌영 동무는 우리의 부름에 답하라"는 전단이 나붙고, 월북 후에도 사무실에 박헌영 사진이 걸리는가 하면 박헌영 지지자들이 '''박헌영 선집'''을 발간해 바칠 정도였다. 특히 분단 이후 월북한 남쪽 출신 공산주의자들이 유일하게 의지할 만한 지도자였다는 점에서 개인 숭배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이런 인물이 조직적인 세력화를 통해 김일성에게 맞서기 시작한다면 김일성의 입장에서는 심각한 위협이 되었을 가능성도 컸다. 또한 김일성은 항상 눈엣가시로 생각하던 연안파의 거두 [[김무정]] 또한 낙동강 전선에서의 패배와 [[평양]] 방어 실패의 책임을 뒤집어 씌워서 [[중국 인민지원군|중공군]]이 참전하기 직전에 숙청해버렸다. 김일성이 [[김무정]]을 밀어내는 과정은 하나의 블랙 코미디였다. 무정이 평양 방어는 무리라고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이 억지로 평양 방어를 떠맡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일성은 평양이 함락당하자 방어사령관이 책임져야 한다고 하면서 무정을 실각시켰다. 하지만 무정은 처형당한 것이 아니라 인민군 죄수부대장을 지내다가 8로군 시절부터 무정의 전우들이 많았던 중국측의 요구로 중국으로 망명했으며, 그곳에서 병사했다고 전해진다. 이런 식으로 전쟁중에도 김일성은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숙청하였고, 전쟁이 종결된 이후에는 미제침략자들에 맞서서 자신들이 승리한 전쟁이라고 강변하면서 권력을 계속 강화해 나갔는데, 북한이 [[정전 협정(6.25 전쟁)|정전 협정]] 체결일인 7월 27일을 [[조국해방전쟁 승리 기념일]]로 대대적으로 선전하면서 기념하는 것에는 이런 이유도 있다. 여기에 스탈린 우상화를 따라한 김일성의 개인 숭배 현상과 맞물려서 김일성파의 권력은 더욱 더 커져만 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